YUKI x 스즈하라 아유
쇼스타코비치 재즈 왈츠 2번
https://youtu.be/LPG_WUgHbis
@synxhexic
스즈하라는 다급하게 들이닥친 구급대원들을 쳐다봤다. 그들이 밟고 지나 간 바닥에 검은 피가 흥건했다. 군데군데 흩뿌려진 피가 미세하게 경사진 바닥 가운데로 모여 작은 웅덩이로 변했다. 분사되다시피 한 빨간 자국들이 바닥에 아주 옅고 고르게 깔렸다. 칼이 깊게 들어간 것 같았다. 분명히 명치를 찌르지 않았었나······. 스즈하라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중얼거리더니, 얼마 가지 않아 무언가 깨달은 눈치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주먹까지 들어갔을 수도 있지. 조금 더 깊이.
숱하게 들은 잡학이었다. 네온 간판보다 화려한 돈다발을 잔뜩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모를 수가 없었다. 호흡기와 소화기를 찔렸을 때의 상처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걸. 이따금 좋은 선례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귀한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해 줄 필요조차 없었다. 잊을 만하면 상기하게 만들었다. 한 번 일이 터지면 곧 대대로 입단속 시그널이 내려왔다. 연약한 뱃가죽을 감싸기 위한 본능이었다.
YUKI는 영화처럼 튄 벽의 선혈을 흘끗거렸다. 여자가 뽑은 사시미칼 끝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았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기침했으니까.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넘어진 채. 깔끔하고 날카로운 구멍에서 덩어리진 피가 울컥, 울컥 하고 쏟아졌다. 남자의 입에서 바람 빠진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디서 부터 달려왔는지도 모를 구급차까지, 일련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한순간에 지나갔다. YUKI는 말없이 스즈하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스즈하라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마저 피워야지.
스즈하라가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에 털었다. 재떨이에 희고 매캐한 연기가 옮겨붙었다. YUKI는 군말하지 않고 장초를 입에 댔다. 연기를 머금어 삼키자 폐부 구석구석이 시원해졌다. 반복해서 여러 번 들이켤 때마다 머릿속이 차츰 깨끗해졌다. 쾌청한 빈자리를 병신같은 충동이 대신 채웠다. 스즈하라는 코트 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꺼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웠다. 소름 끼칠 만큼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난 이게 돛대거든.
벌써?
YUKI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벌어진 잇새에 껴 있던 필터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YUKI는 다시 한번 막대를 빨았다. 연기를 끝까지 들이마셨다가 날숨을 뱉자 흐리멍덩하고 옅은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열심히 마셨어. 스즈하라가 어깨를 젖히고 깔깔 웃었다. 자기가 구급차나 쳐다보고 있을 때 나는 열심히 마셨다고······. 담배 연기를. 아니, 샴페인을? 남자가 흘린 피를? 스즈하라가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누가 들을세라 허리를 푹 숙이고는 YUKI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나도 다 봤어.
YUKI가 스즈하라를 보면서 웃었다.
공주님은 좋은 것만 봐야 하는데.
스즈하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왼쪽 턱을 감싸고 맞받아쳤다.
어머, 그럼 여기에 있으면 안 되지.
에스코트라도 해 줄래. 스즈하라가 YUKI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스즈하라와 YUKI의 손바닥이 빈틈없이 포개어졌다. YUKI가 손아귀에 힘을 줘서 스즈하라를 일으켰다. 의자 모양으로 구겨져 있던 스즈하라의 흰 롱스커트가 풍성하게 퍼졌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름진 밑단이 하늘거렸다. 곧 가게의 정문 밖으로 스즈하라의 치맛자락이 사라졌다.
스즈하라는 담배를 두어 번 빨다가 제 폐부에 머금은 연기를 뱉어냈다. 점점 옅어지는 흰 연기가 스즈하라와 YUKI의 어깻죽지를 감쌌다.
어디서 많이 본 연출인데. 스즈하라가 생각했다. 아지랑이처럼 구불구불하게 맴돌던 연기가 다음 숨을 내쉬기 전에 사라졌다. 얼마 가지 않아 스즈하라가 새 날숨을 천천히 뱉었다. 추도식 같은 거였다. 이를테면 오늘 실려 간 호스트의 명복을 빌어 주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어도 그냥 했다. 때로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어긋난 논리를 시간과 장소의 구애 없이 펼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이만큼의 깡도 없으면 가부키초 바닥에서 오래 구르지도 못한다. 가게를 나온 스즈하라가 서너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만큼 좁은 골목 벽에 기댄 채 입안에 매운 공기를 잔뜩 품기를 반복했다. 제 딴에 싼 티를 벗어 보겠다고 떡칠했을 락카 색이 꼴사납게 번지고 바랬다.
가부키초는 가로등이 필요 없는 거리였다. 형광등보다 밝게 빛나는 네온사인이 그 역할을 대신했으니까. 어떤 색이든 지극히 원초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오래 보면 눈이 멀 것 같았다. 인적 드문 샛길조차도 작은 펍의 뒷문에 서 네온사인이 번져 나왔다. 적나라하고 빨간 불빛이 골목에 숨어든 둘의 낯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스즈하라는 YUKI의 선명한 눈썹을 보면서 싸구려 네온사인에 눈을 뺏겼던 날을 떠올렸다. 등에서 눈을 떼고 나서도 한동안은 빛이 잔상처럼 따라다녔다. 강렬한 보랏빛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함께 점멸했다. 그날, 스즈하라 아유는 YUKI의 입술에 손을 댔다. 작고 둥근 피어싱이 느껴졌다.
한곳에 눌러앉은 그녀로서는 드문드문 보이는 좁고 낡은 펍 따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거리를 일부러 활보할 참이면 그제서야 풍경처럼 녹아드는 것이었다. 그곳에선 겪은 적도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왈츠가 흘러나왔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곡선들이 그 뒤를 따랐다. 분명 관광객들을 겨냥한 것일 테다. 제 좋을 때로 껍데기만 핥고 가는 작자들 말이다. 만약 YUKI를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옛날 음악 좋아해?
스즈하라가 꽁초를 뒤꿈치로 짓이기며 물었다. 뾰족한 기둥 같은 굽 바닥 에서 불규칙한 흰 기둥이 솟아올랐다. 습관처럼 새로 연 알루미늄 담배 케이스가 텅 비어 있었다. 스즈하라의 잇새에서 아, 하고 희미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미간을 굳힌 스즈하라의 눈길이 YUKI의 주머니에 꽂혔다. 스즈하라는 종내 자신의 물음을 끊고 YUKI에게 먼저 요구했다.
불 좀 빌려줘.
분부대로 하지요.
YUKI가 입꼬리를 둥글게 끌어올렸다. 분명 남은 담배를 빌려달라는 투였다. YUKI는 별말 없이 장초를 한 개비 꺼내 스즈하라의 입에 물렸다. 그러고는 닳고 닳은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깠다. 딸깍 소리가 났다. 라이터가 이것밖에 없어, 멀쩡한 건 다 버렸어, 사실 금연하려고 했거든, 그냥 짧은 변덕이지만. 멋쩍어진 YUKI가 이것저것 사족을 덧붙였다. 작은 불씨가 위태롭게 점화했다. 스즈하라는 뾰족하게 일렁이는 불씨에 담배 끝을 대고 힘껏 빨았다. 오똑한 코끝이 조금 따뜻해졌다.
스즈하라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짙은 눈동자 안에 벌건 담뱃불이 번졌다. 스즈하라는 연기를 한 번 더 머금더니, 막힌 숨을 토해내듯 짧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선 금연 못해. 로비를 지나기도 전에 실패할걸.
YUKI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검지로 입술을 쓸던 스즈하라의 단호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늘부터 우린 한배를 탄 거야. 실패할 일은 없어. 문득 초점을 환기하자 눈을 내리깐 스즈하라가 보였다. 스즈하라의 구두 굽이 아스팔트를 몇 번 스치더니 검고 가늘고 선명한 자국을 냈다. 약속대로 실패 할 일은 없었다. 이제는 갚아야 할 차례라는 걸 YUKI는 잘 알았다. 두 배든 백 배든. 이곳에 공짜는 없으니까. 가진 게 없다면 몸과 목숨으로 돌려줘야 했다. 사시미칼에 맺힌 피가 환상처럼 눈앞에 자꾸만 펼쳐졌다. 빨간 물이 방울져 떨어질 때마다 무릎에서부터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오래 쌓인 나이테 같은 오금이 저렸다.
기실 초장부터 스즈하라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기 때문일 테다. 같잖아 보이는 변덕 한 마디로 지명 당했던 가련한 청년 말이다. YUKI는 몰래 제 목을 만지작거렸다. 스즈하라의 눈 밖에 난다면 불사조 같은 쓰잘데기없는 별명조차 붙이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러고도 남을 여자라고 생각했다. 스즈하라 아유, 제 모든 걸 갖고 싶어 하는 여자. 명예도 사랑도. 하다못해 손톱 한쪽과 살점 한 덩이까지. YUKI가 에둘러 물었다. 목구멍 속에 만연하게 깔린 저의가 감쪽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스즈하라가 길고 얇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내가 아직 피우고 있잖아.
스즈하라는 YUKI의 주머니에서 장초를 꺼내 입술에 물렸다. 여상하게 라이터를 켜려는 YUKI의 손을 거칠게 쳐낸 뒤, 목덜미를 끌어당겨 허리를 숙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담배 끝을 맞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YUKI의 담배에 작은 불씨가 일었다. 일순 터져 나온 흰 연기가 둘의 얼굴 사이로 퍼졌다. YUKI는 허리를 세우지 않은 채 천연덕스럽게 스즈하라의 비위를 맞췄다. 그러네. 내가 안일했네.
빨간 네온도 질릴 때가 됐다. 싫증 내기 딱 좋은 색이니까. YUKI는 스즈하라의 콧잔등 옆에 절벽처럼 드리운 그림자를 따라, 칼끝을 매만지는 것처럼 뺨을 쓸었다. 스즈하라의 속눈썹이 유난히 길어 보였다. 별안간 스치는 안광이 섬뜩할 만큼 부드러웠다. 스즈하라는 YUKI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올곧게 받아내다가, 담배를 입에서 빼고 YUKI의 낯에 그대로 연기를 뱉었다. 둘의 시야에 흐릿한 연기만 남았다. 스즈하라가 몰래 웃음 지었다.
YUKI는 연기가 모두 걷힐 때까지,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여전히 시선이 직선으로 맞아떨어졌다. 스즈하라가 마침내 회피하자, YUKI가 스즈하라를 따라 조용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러던 중, 반쯤 돌아서 있던 스즈하라가 몸을 다시 앞으로 홱 돌리더니 갑작스럽게 선언했다.
맹세할게, 난 배신 안 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죽는 한이 있어도.
YUKI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느리게 웃었다.
그으래.
그러거나 말거나 스즈하라는 당당하게 일장 연설을 했다.
대신 그만큼 나를 사랑해 줘야 한다는 말이야. 기브 앤 테이크인 거지. 나는 명예를, 너는 사랑을. 손해 볼 거라고는 하나도 없어. YUKI, 네 모든 처음을 나에게 줘. 나를 사랑해 줘. 우린 한배를 탔잖아. 그러니까 돕고 살자. 어?
······.
안아줘. 지금 당장. 그리고 여기를 이렇게······.
펍의 플레이리스트가 돌고 돌아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왈츠 2번이 흘러나 왔다. 스즈하라가 도드라지는 비올라 소리에 맞춰 YUKI의 오른손을 제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발걸음을 삼박자로 옮겼다. 허리를 단단하게 곧추세우고 손목에 힘을 뺐다. 뒤쪽 발에 체중을 실어 첫걸음은 깊고 세게, 두세 번째로 갈수록 점점 여리고 약하게. 그러면 자연히 먼저 내디딘 발로 체중이 옮겨 실린다. 무심결에 쪼개지는 박자를 셀 필요도 없었다. 어깨, 팔꿈치, 손목, 손 끝이 차례대로 움직였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추는 왈츠라니, 클럽 벽지에 영화처럼 튀었던 피가 생각났다. 칼을 입에 물고 춤을 추는 셈이다. YUKI와 스즈하라는 다리를 계속 움직였다. YUKI가 두 걸음 직진한 뒤 오른손으로 스즈하라를 돌렸다. 회전하는 스즈하라의 흰 치마가 둥글고 화려하게 퍼졌다. 상체는 가만히 둔 채 골반만 옆으로 돌렸다. 그 상태로 또 스텝을 밟았다. 스즈하라는 두 눈을 감았다. 온몸을 오로지 YUKI에게만 맡겼다. 대답 따위 하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일종의 통보였으니까. 이곳에 공짜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걸 스즈하라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즈하라의 오른팔이 유연하게 늘어졌다. YUKI가 깍지 낀 아귀에 힘을 줘서 스즈하라의 손을 잡았다. 둘의 고개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무게가 왼발에 온전히 실리면서 중심선이 한순간에 곡선으로 변했다. 그대로 발목의 방향을 틀자 뒤이어 몸이 따라왔다. 가벼운 발걸음을 규칙적으로 디뎠다. 무차별하게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 화음이 점점 성대해졌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네온 그림자가 다르게 늘어졌다. 그림자는 찰나 동안 이목구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콧날을 따라 서서히 그늘졌다. 둘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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